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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FEX 미술수첩
현대미술

 

​미술수첩 1

첫번째 이야기 NO1.

 

사회적 변혁이 함께 했던 추상화 과정
독립적인 예술의 분야 회화 탐구.
<인상주의>
- 마네와 모네를 비롯한 작가들의 마음을 순수 지향적인 방향이 탈재현의 시발점이 되는 인상주의를 개척하게 되었다.
- 사물을 주관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는 첫번째의 단계로  순간적인 사물의 인상을 포착하는 방식을 찾아냈던 것이다. 
- 인상주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주관을 직접적으로 투입하기보다는 어떠한 순간의 포착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

  재현에서 많은 거리를 이탈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인상주의 & 후기인상주의>
- 이시기에 이르러서는 주관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경우 사물을 색 · 점으로 환원하여 표현하려 하였다.
-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고흐의 경우는 회화를 통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려 하였고, 고갱의 경우는 사물을 단순화하여 색 · 면으로 그리려 하여 대상물이 지니고 있는 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보다는 주관적인 색 · 면으로 환원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

 

NO2.

고흐의 경우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열정이나 풍부한 선율 혹은 광적인 에너지를 화폭에 담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표현적인 요구는 사물을 일그러지게 하거나 에너지가 가득한 화풍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강렬한 표현성이 강조되는 힘찬 필치로 왜곡된 사물의 모습이 드러나는 인물화나 풍경화를 제작하는 단계에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칸딘스키나 들로네,키르히느, 놀덴, 마르크를 주축으로 하는 표현주의의 원류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고갱의 경우 입체감이나 원근의 표현보다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하고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색채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타이티 섬에서 여러 가지의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특이한 발상을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그러한 화풍은 곧바로 마티스나 루오,블라맹크 등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야수주의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잔느의 경우는 사물을 지극히 기본적인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여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원근법을 이탈한 그림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세잔느의 이론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원류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를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지칭한다.

 

 NO3.

주관적인 신념을 지향하는 회화작품은 모더니즘의 근간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그들은 자연물이나 인공물 혹은 사물의 표현에 있어서 다양한 사상이나 시각을 지니고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대상을 자신이지니고 있는 정서나 이념 혹은 사상들을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주관적인 방식을 회화의 기본적인 원리로 적용하면서, 단순히 탈재현을 넘어 회화에서 순수한 색채와 구조를 생각하기에 이른다.이러한 주관적인 신념을 지향하는 회화작품은 모더니즘의 근간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그들은 자연물이나 인공물 혹은 사물의 표현에 있어서 다양한 사상이나 시각을 지니고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대상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서나 이념 혹은 사상들을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주관적인 방식을 회화의 기본적인 원리로 적용하면서, 단순히 탈재현을 넘어 회화에서 순수한 색채와 구조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피카소,브라크 등의 화가들에 의해 사물의 원래적인 모습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서,사물을 잘게 부수어 표현하는 방식을 연구하기에 이르러 입체파를 형성하게 되며,마티스,블라맹크 등의 화가들의 경우는 사물은 극렬히 단선화하여 단순 조형요소인 색 · 면으로 환원하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야수파를 형성하게 된다.

큐비즘의 경우는 철저히 대상물의 분해하여 세잔느가 추구했던 형태의 가하학적인 환원법을 직접적으로 적용하여 그들의 화풍을 정당화하는 지평으로 사용하였으며, 야수파의 경우는 고갱의 화원적인 색 · 면에 의한 표현방식을 도입하여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NO4.

1910년에 이르러서는 칸딘스키와 들로네 등의 방식에 의거하여 재현의 단계에서 사물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완전히 소거되고 순수한 조형요소만이 남겨지는 완전추상회화가 이룩되었다.그들의 노력은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어 순수미와 절대미를 탐구하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가치관은 “전통적인 재현을 모토로 하던 19세기 이전의 미술과의 차별성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모더니즘을 성립시켰다. 후기인상주의 거장인 세잔느, 고흐, 고갱 등의 예술이론에서 세거장의 예술은 각기 다른 유형의 모더니즘을 이룩하는 시발점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 후, 이러한 흐름은 색채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야수주의, 감정을 극렬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표현주의 혹은 단순한 형태를 지향하는 절대주의나 신조형주의 등의 기하학적인 추상이나 면을 무수히 분할하는 입체주의 작가들이 가장 선구적인 생각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칸딘스키, 들로네, 말레비치와 몬드리안, 브라크와 피카소 등이 그들이었다. 인상주의에서 시작된 탈재현은 추상화 과정을 거쳐,1910년대에 이르러 극도의 단순화에 도달하게 되어 ‘완전추상’의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를 선구적으로 이끌어 나간 작가는 네덜란드의 몬드리안과 러시아의 말레비치이다. 그들은 대단히 중요한 단순화의 실험을 행하게 되며, 각기 다른 유형의 회화, 즉 몬드리안의 경우는 신조형주의를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이룩하였다.

NO5.

 

완전 추상의  화풍은 피카소나 브라크가 이룩해 내고 있는 큐비즘과는 대별된다. 큐비즘의 과정은 인물이나 사물을 구조화하는 과정은 유사하지만, 그 장점에 있어서 대단히 복잡한 면의 분할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피카소가 이룩한 이러한 분석적인 큐비즘은 면의 분할이 인체나 사물 등의 원래의 형식을 다른 시각으로 표현한 것에 해당되므로 순수하게 조형요소만으로 이루진 회화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가 이룩한 단순화에 의한 추상화는 일체의 인체나 사물의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 없는 순수한 입장에서 순수한 조형을 이룩하는 것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순수한 선과 순수한 색의 하모니의 다양한 변주를 계획했던 단계에서 말레비치는<흰 사각형 위에 흰 네모꼴,1910>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것은 표현의 한계에 까지 밀고 나아가는 추상화 과정의 정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이념에 가장 충실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NO6

 뜨거움과 차가움

탈재현으로 시작된 모더니즘의 시발점은 불과 40여 년 만에 추상화 과정으로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0년경 인상주의가 성립되던 시기에서 모더니즘의 근원을 찾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 인상주의는 재현적인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으므로 모더니즘의 시발점으로는 보이나, 그 이념적인 근원을 제공하는 주된 골자를 지니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이후 초기의 양상에는 두 가지의 특징적인 흐름이 있는데, 인간의 내면적인 정서를 반영하여 강렬한 필치와 원색적인 색상, 두터운 마티에르 등을 근거로 하여 표현하는 뜨거운 경향과 이러한 표현성을 극도로 억제하여 주로 기하학적인 형태 혹은 지극히 단조로운 조형요소 만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차가운 경향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차가운 경향으로 치달은 당시의 가장 선구적인 미술은 큐비즘이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를 필두로 대상을 주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신조형주의나 절대주의, 혹은 그 뒤로 이어지는 기하학적인 추상 등 다른 유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큐비즘의 대가들인 피카소와 브라크의 경향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이는 단순 추상으로 향하는 논리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순수조형요소란 재현과는 매우 다른 주관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조형요소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어휘를 다시 재구축하는 과정이 예술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많은 서구적인 예술가들이 뒷받침해 주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주변 이념들과 맞물려 있었다. 사물을 재구성하고 이를 자신의 논리에 맞추어서 이리저리 조합하는 과정 뜨거움과 차가움의 이원적 경향이 두드러진 시기가 바로 전기 추상회화의 성립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NO7

아방가르드 정신과 무의식의 세계

1913년 전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공포는 예술가들이 이전처럼 차분하고 질서 있게 면을 세분화하거나, 심미주의적인 경향의 추상미술을 이행해 나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전쟁을 피해서 많은 예술가들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전쟁이 안겨 준 피비린내 나는 비인간적인 파괴적 정서를 소화할 수가 없었다. 기존의 예술적 질서를 수용하기보다는 파괴하는데 주력하였고,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다다이스트로 분류되는 그들은 노골적으로 반(反)예술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근대미술이 성립되는 시기에 부각된 완전추상을 지향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 간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 추구해 나가는 방향이 매우 혼란스러워졌고, 항시 형이상학을 지향하였던 큐비즘이나 기하학적인 추상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22.03.02)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예술의 범주를 너무도 이탈하여 당시의 미적인 관점을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고, 예술가적인 경로에 있었던 피카비아나 만레이 등의 작가들 스스로도 반예술 혹은 반큐비즘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십분 발휘하여 엄청난 파격적 시도를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예술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파격의 한계를 이탈하였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표현상황에 대한 분별에 있어서 난해와 파격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즉, 다다이즘의 등장은 조형예술을 판별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논의를 매우 어렵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절차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기존의 원리로 예술을 판단하였던 근거와 그것을 유지시키는 지속성에 따른 함수 관계의 규명이 어렵기 때문이였다.(2022.03.28)

 

 

NO8

다다이즘의 등장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의 놀라운 실현

첫째로, 근대 이전까지의 미술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레디메이드를 작품의 모티브로 활용했다.고대미술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몫에 해당되는 것은 묘사한다거나 그린다거나 제작한다거나 하는 등 작가의 손이 닿아야 했다. 그러나 선택으로서의 아이디어가 매우 중요했으며, 그것은 이후의 콜라주라든가 아쌍블라주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묘사나 행위가 필요 없는 선택으로서의 아이디어는 이후의 현대의 예술가들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당시의 예술에서는 참지 못할 파격이었다.

둘째로는, 낙서를 동원한 칼리그래피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스키야의 낙서 회화에서 이러한 특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살르의 그림들에서 시도되는 오버랩의 기법들에서도 그러하다.

셋째로는, 잡지나 신문 등에서 오려 낸 사진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현실의 특수한 장면 들을 모으고 오려 붙여서 독특한 재구성을 행하여 또 다른 독특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신디 셔먼의 경우는 자신의 이미지를 수없이 변질시켜서 사진으로 연출하며, 데이비드 호크니의 경우는 여러 종류의 사진들을 콜라주로 제작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특수하게 미완성의 단계서 마무리하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전통적인 사진의 기법이 무시되며, 작가가 지니고 있는 소신에 의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특수한 환경이 동시에 설정되곤 하였다. 전통적인 일면에서 예술이란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켜 주는 것’, 즉 청각과 시각에 쾌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청각예술과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조형예술이 성립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의 파격적인 아방가르드 정신을 계승한 또 다른 특징적인 방법이 있다면, 인간의 내면세계의 밝혀지지 않은 비밀과 같은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의 세계를 표출하는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초현실주의 화풍이라 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앙드레 부르통, 이브 탕기, 르네 마그리트 등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 미술을  개척한 화가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연구하여 그려 낸 많은 회화작품들 중에는 대단히 암시적이고 성적인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흐물흐물한 혀와 인체의 특정 부위를 그렸으며, 이러한 이미지들을 왜곡시켰다.

 

NO9

탈재현의 시작

인상주의 이후의 탈재현 경향은 예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연의 욕구 가운데에서, 그냥 자연을 닮게 하거나 재현하는 단계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여 화가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정서를 이입시키기는 단계로 돌입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특히 사물의 현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인식의 기초를 토대로 하여 제작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조형예술의 활동에서 커다란 전환을 예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말의 거대한 시대적인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시대의 인식의 전환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전환기의 관한 논의 또는 모더니즘의 시작이면서 회화 자체의 거대한 입지론의 추구에 관계되는 변화로 설명하려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점을 1863년, 즉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가 제작된 시기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전에서 찾을 수 없는 빛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물 자체의 인식의 전환이며, 표현에 있어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기점 설정을 여기에 두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2022.03.03)                                                                                             

 

 

 

 

 

 

 

 

데오 반 데스부르크 (Theo van Doesburg,1883~1931)

반 데스부르크는 1883년 네덜란드에서 출생했다. 처음에는 연극과 동화나 희곡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13년에는 회화와 건축의 통합에 관한 연구를 하기도 했으며, 1915년에는 몬드리안과 처음 만났다.

이 당시부터는 암소, 정물,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점차적으로 추상화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었다. 그는 1917년 『데 스틸』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으며, 몬드리안과 함께 신조형주의 운동을 전개한 화가이다. 1921년에는 중부유럽 등지를 순회하면서 자신의 조형영역을 확장하는 준비를 하게 된다. 그는 다다이스트들과의 교분을 쌓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1922년에는 네덜란드 다다이스트들의 잡지 『메카노(Mecano)』의 창간에 가담하기도 하여 네덜란드에 다다이즘 운동이 전개되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수직과 수평에 의한 조형이념을 추구하는 몬드리안과 뜻을 같이하는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1923년에 조형에 대한 폭넓은 시도를 행하기 위해서 ‘사선’의 표현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1926년의 ‘원소주의(Elementarisme)’라는 선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데 스틸 운동의 주된 이념과 당시의 우주관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몬드리안은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서 둘 사이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결국은 몬드리안과 결별하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몬드리안은 대각선을 역동성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자연의 출현이며, 경박한 표현이다”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직과 수평에 의한 ‘탈 자연’은 인류 진보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서 신조형주의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았으며, 자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추상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탈 자연화하는 것은 곧 심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의상이 단순 지향적으로 흐르는 것과, 근대적인 미감에 의해서 여성이 화장하여 자신의 생김새와 피부 빛깔은 단순화시키는 것은, 자연스런 얼룩한 피부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몬드리안은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인간은 자신이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자만에서 벗어날 때, 마치 에덴에서 행복을 구가하는 것과 같다” 고 생각했다.

(몬드리안,『집 길, 도시(Le Home,laRue.La Cite)

반 데스부르크는 1927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의 레스토랑인 ‘오베트(Aubette)’의 장식에 함여하기도 했으며, 1929년 이후부터는 파리에 정착하여, 1930년 최초로 발간되는 『구체미술(Art concret)』의 잡지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31년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사망하였다. (2022.03.24.)

색채의 자율성과 순수한 조형

 

20세기 초 색채를 우위로 두었던 야수파 화가들에 이어서 칸딘스키, 들로네를  비롯한 동시대의 작가들은 자신의 양식에 있어서 순수추상의 길을 항상 모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음악을 동경했으며, 음악처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심하였다. 이러한 바람은 색채가 지니고 있는 순순한 상징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모더니즘의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양식을  찾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자유로운 색의 조형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하여 순수한 추상이 성립하게 되었다. 또한 말레비치의 기하학의 신뢰와 몬드리안의 순수한 조형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순수주의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념에 근거하여

오르피즘과 순수주의

1) 오르피즘

20세기 초두는 동시다발적으로 각국의 예술가들이 추상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시기로서 로버트 들로네(Robert Delaunay)에 의하여 프랑스에서는 오르피즘이라는 전위적인 예술운동이 발생한다. 이 당시의 상황은 동시다발적으로 각국의 예술가들이 추상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비록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운동이 일어났긴 하지만, 들로네에 의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추상운동이 펼쳐지게 된다. 들로네의 오르피즘은 강한 색채감정과 색채에 따라 자율적 리듬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 회화를 이끌어 낸다. 

① 들로네(Delaunay, Robert, 1885~1941)

1910년경 들로네는 자신의 독자적인 색채와 빛에 대한 관심을 주제로 양식적인 특징을 심화시켜 나간다. 빛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서 <창 (window)> 시리즈를 제작했으며, '창'이란 구체적인 대상의 형체보다도 창을 통해서 반사되는 빛의 미묘한 투사의 변화를 포착하여 추상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와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에펠탑> 시리즈는 큐비즘적 요소가 강하지만 대상의 분해임과 동시에 시점의 변화에 따른 움직임이란 질서에 의해 굴절된 풍경을 표현하여 독특한 추상을 개척하게 된다. 

오르피즘이란 동시성의 회화로서 시간적 요소의 개입을 의미한다. 들로네의 양식은 기계적인 미래파와는 또 다른 입장에서의 동시성의 회화에 도달하게 된다. 미래파 회화의 연속적인 동작에 기인한 동시성의 원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아폴리네르는 하나의 타블로(tableau: 그림ㆍ그림 간은 묘사)를 얻기 위해서 "인상파의 노력은 빛의 환영을 묘사함에 의해 성공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 후 쇠라가 보색대비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 자신은 아직도 타블로라는 사상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이 대비는 그 개인의 것으로 한정되고 또 자신에 의해서만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으니 다음 세대(들로네)의 탐구자에 새로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미술수첩2

 

 

◆ 옵티컬 아트 (시각적 착시 효과)

 

옵티컬 아트(Optical Art)는 옵아트(Op. Art)라고도 부르며, 눈의 착시에 의존하는 예술로서 환영(illusion)의 움직임을 추구하기 위한 장르이다. 이 용어는 1964년 타임지의 한 기자가 사용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옵티컬 아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험적인 시각에 의해서는 체험하기 어려운, 즉 일상적인 시각이나 다른 형식의 예술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심리적인 과정이 눈을 통하여 관찰자의 뇌에 전달되게 함으로써, 관찰자의 눈을 통해서 나타나는 효과를 이용하는 예술 방식을 지칭한다.

(시릴 바레트, 정미희 옮김,『옵아트』, 미진사, 1987 p.7)

 

'지각적 추상‘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는 용어로서, ‘시.지각의 효과가 망막에서 이루어지는 생리적 현상’을 이용한 예술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각적이란(perceptual)이란 시.지각에 의해 이룩되는 체험을 심리적 현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개인차가 존재할 수 있으며, 대단히 주관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피곤할 때 마신 알코올이 우리 몸에 퍼지면서 작용할 때, 또는 무의식 상태로부터 깨어날 때, 그리고 어두운 촛불이 꺼지려고 할 때, 우리의 지각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반적인 관찰자의 시각적 환영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장르이기도 하다. 작품 구성요소들의 조종을 통해, 물리적으로 시각과 동적 감각을 변형케 하고 일상적인 감정이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미학적 탐구는 급기야 예술의 요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삼각관계를 변형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의 착시 혹은 눈의 미묘한 일루전, 시각의 피로함에 따라 달라지는 효과를 이용한 작품의 세계에서 관객은 자신의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나의 그림(tablo)에서 펼쳐지는 미묘한 세계를 채득할 수 있게 된다.

 

옵티컬 아트에서 단순한 구조물 혹은 선의 나열 혹은 집중현상 혹은 동적인 흐름을 관찰하는 동안 미묘한 현상이 분해되기도 하며 물결치기도 하며, 갑자기 다른 형상 혹은 무늬 등으로 등장되는 일종의 환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종래의 상관적인 역할이 역전되어, 예술가가 익명으로 머물게 되고 작품은 하나의 조형적 제안으로 변하며 관객은 연기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예술적 풍토를 새롭게 하는 새로운 미학임에 분명하다. 바레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학문적인 해설의 불가능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공통적인 의견을 수렴하는 가운데에서 지각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만 설명하였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 자체 속에 스스로를 발견케 하고 독특한 시각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현실과 마주서게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다양한 영상을 통해 움직이는 현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는 또한 팝아트의 대다수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정착된 현실과 대치점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옵티컬 아트는 일반적으로 전 화면에 걸친 구성 단위의 반복에 의한 확산적, 연속적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옵티컬 아트는 앵포르멜 운동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예술운동 이었으며, 1960년대 초에 구성된 몇몇 그룹에 의해서 확장되어 간 예술운동이 되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그룹은 훌레오 레 팍에 의해서 결성된‘시각예술을 추구하는 그룹(Group de Researche d'art Visual)이었다.

 

◆ 빅토르 바자렐리

 

바자렐리(Victor Vasarely)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arely)는 1908년 4월9일 헝가리에서 출생하였다. 그 뒤에는 1930년 프랑스로 이민하여 1959년부터 1927년까지는 부다페스트의 주립대학에서 그림공부를 하였으며, 29년부터30년까지는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에서 회화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30년부터의 파리 체류 당시에는 사실주의적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 스스로 적절한 표면효과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가 옵티컬 아트의 작가로 성장하게 된 이유를 어린 시절의 성장 배경 가운데에서 찾으려는 논자들도 있다. 왜냐 하면, 그가 어렸을 때부터 격자무의나 선으로 짜여진 천과 그것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재질감에 대단히 매료되었다는 점과 창문의 이쪽에서 저쪽을 통하여 옮겨가면서 바라다 본 것처럼 태양을 이중적으로 그려서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시절 병상에서 붕대가 겹쳐지면서 생겨난 특이한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점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최초의 시각예술이라 명한 작품<직조를 위한 스케치, 1932>의 경우는 네모의 형태의 그리드 형식인데, 이 작품에서 사용되는 네모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변화를 꾀하는 방식을 통해서 시각적인 율동감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각형과 사각형 사이에는 명암의 대비효과로 인해서 어둡게 보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1933년부터 1938년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인 옵아트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완성되었다.<광대, 1935>,<얼룩말, 1932~42>의 경우는 이러한 시기에 완성된 작품인데, 바자렐리는 사실적인 이미지가 등장될 때,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일루전이 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상업미술가로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체스보드,1935>의 경우 공간 일루전을 전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표면에 선들의 파동을 부풀게 하거나, 넓이를 축소시키는 등의 시각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1944년에는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을 파리의 데니스 르네 갤러리에서 개최하였는데, 이 당시부터 대단히 독창적인 공간의 연출방식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조직적인 형태들에 의한 원형, 사각형, 타원형, 삼각형 등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시각적인 조화와 긴장을 조성하여 투명 색과 불투명한 색상들이 겹쳐지고 부드럽게 중첩되며서, 공간에서의 특수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바우하우스의 화가들의 방식을 개선한 것이기도 하다. 1951년에는 격자무늬의 패턴을 회고적으로 다루기도 했으며, 1953년에는 투명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투명1953>의 경우는 동심원을 그리는 원형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을 주고 있는데, 돌아가는 프로펠러 형태의 선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이 원근법적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중앙 집중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서는 2중으로 분리된 원형의 집단이 등장하여 시각적인 착시현상이 발현되어 지속적으로 회전하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작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대하여 바레트는 “이 그림은 움직임을 통해서 토명한 원이 생기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두 개의 그림 매체 사이의 상황을 제시하는 투명한 그림을 기본거인 기능의 측면에서 하나의 원형이 다른 원형에 겹쳐서 움직이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감상자의 누이 그 작품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다.”

 

1954년에는 옵티컬 아트의 양식을 발전시켜 움직이는 키네틱 요소가 가미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힘입어 1955년에는 몇몇의 예술가들과 함께, 데니스 르네 갤러리에서 가진 전시회에서 <황색선언>을 통하여, 조형적 운동주의(Plastic Kineticism)를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대체적으로 모노크롬의 양식을 사용하였으나, 점차적으로 색채를 가미한 양식을 구축하였는데, 몇 가지의 문제점으로 인해서 그다지 효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1959년에는 플라스틱을 이용한 콜라주 형식으로,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진 원형, 타원형, 사각형 등을 부착한 화면을 연출하여 옵티컬 회화양식의 3차원적인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작품<오리온(Orion MC), 1963>의 경우는 전형적인 바자렐리의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수백 개의 원과 타원이 모서리로부터 내부에 이르기까지 그려지고 있는데, 작품의 전체는 대단히 민감하게 드리워진 병치 요소와 색조로 인해서 강력한 빛이 드리워진 스크린과 같은 효과를 보여 주었다.(2022.03.04)

 

                                 

 

 

신지학과 우주

 

1) 데 스틸 운동

 1917년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데 스틸(De Still) 혹은 신조형주의 운동(Neo-Platicisme)으로 불리는 추상운동이 펼쳐졌다. 데스틸은 네델란드어로는 ‘양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그룹은 모두 공통의 예술철학이나 아니면 개성의 교류에 의해 현대의 건축 및 산업디자인의 발전에 관련을 맺고 있었다.(허버트 리드, 현대미술의 원리)

  이러한 조형이념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입체파의 영향으로 당시의 선구적인 화가들의 조형이념이 순수한 회화의 구축과 순수한 조형요소에 의한 순수한 표현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 스틸 운동의 일원들은 대부분 엄격한 칼비니스트 가정 출신으로, 금욕적이고 엄격한 작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초자연적인 질서의 원리를 연구하는 데 있었다. 세잔느 회화의 궁극적인 아이디어이며, 모더니즘 추상의 근원이 되는 “모든 사물은 원뿔, 원기둥 구로 환원될 수 있다”는 조형이념을 계승하여 환원 지향적인 추상방식을 구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념이 성립하게 된 사상적 배경은 신플라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스헨마 겔트의 저술인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 『조형 수학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데 스틸 운동을 지지한 스헨마켈스는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라는 논문을 통해서 “지구를 만드는 두 개의 정반대의 기본은 강한 수평선, 즉 태양을 도는 지구의 궤도, 그리고 수직, 즉 태양의 중심에서 발산되는 광선의 심원한 공간운동이다...” 라고 역설하였으며,이러한 논의는 신조형주의 작가들의 조형으이 기본이 되는 수평, 수직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신지학에서 주장하는 우주의 근원이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는 학설이 대단한 영향을 주게 된다. 선구적인 조형이념은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나 우주관 등 그 시대를 리드해 가는 선구적인 이념 혹은 아이디어에 근거하여 출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주거의 개념을 예술품으로 보려는 진보적 의식에 대하여, 건물과 그 속의 비품을 별개로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합동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철학자인 허버트 리드는 ‘형이상학적 불안을 가진 국민과 민족’으로서 북구의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나라를 들고 있으며, 타 국가와 비교해볼 때, 20세기의 조형이념이 추상화되어 가는 경향이 뚜렷하며, 경직되어 가는 표현의 특성이 현저하다고 설명하면서 차가운 추상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조형이념은 단순히 회화나 조각에 그치지 않았으며, 디자인, 공예, 건축 문학...등에까지 영향을 주는 거대한 조형이념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조형이념을 대표하는 작가인 화가 몬드리안, 반 데스부르크가 데 스틸 운동의 공동창시자가 되며, 이어서 화가 반 데 렉크(Van der Leck)와 조각가인 방통 겔르로 건축가인 오드, 바르트, 로브 반트 호프(Rob vant’ Hoff), 리트 벨트, 영화감독인 한스 리히터, 시인 코크 등이 있으며, 후일에 미래파 동인이 되는 지노 세베리니도 있다. (2022.03.04)

데 스틸 운동을 직접적으로 회화 및 조각에 적용하기 시작할 무렵, 몬드리안은 신지학에 기초한 “사물(풍경, 나무, 집)의 저변에는 본질이 있고, 서로 어울림이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여 표현하려 했다. 미술가의 목적은 밝혀지지 않은 보편적 조화를 찾아 내어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구체적인 표현방법으로 수직.수평선의 조형적인 형태와 이를 뒷받침하는 삼원색. 삼비색 등 가장 단순한 조형요소를 찾아내어 완전추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즉, 무엇인가를 충분히 분석. 단순화시키면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처음에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를 창시할 당시에는 곡선. 사선 등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며, 반 데스부르크가 사선을 사용하였을 때, 이를 참지 못하고 결별할 정도의 엄격한 캘비니스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1926년 몬드리안은 반 데스부르크와 사이가 완전히 멀어지면서“탈 자연은 인류 진보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서 신조형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추상한다는 것이다. 추상행위에 의해 우리는 순수한 추상적 표현에 이른다.”고 생각하였으며, 반데스부르크의 대각선이 주는 역동감은 일종의 자연의 출현이었으며 경박한 표현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는 회화에서 수직 . 수평선 그리고 원색을 사용하여, 평등성, 균형을 지니며, 명료하고 밝으며 힘찬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양식은 추상적인 형상을 가지고 대상을 완벽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신이 들어설 자리와 신비적인 방법으로 채울 수 있는 곳마저 빼앗았다는 느낌을 지니게 된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쇤마커스는‘우리들은 자연을 철저히 파악함으로써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자연은 그렇게도 활기 있게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절대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라고 대변하기도 했다.

 

몬드리안(Mondrian, Piet,1872~1944)

외부세계를 떠난 근본적인 실험을 통해서, 당시의 전위적 화가인 세잔느와 입체주의 화가들은 몬드리안에게 ‘순수구성’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입체주의적인 면의 세분화와 그것의 집적에 의한 대상의 재구축의 공간개념에 반대하여, 극히 환원적인 선과 색이 표현된 평면의 사용으로 자연을 초월하여 보편적 조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질서를 확보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몬드리안은 ”우리들은 지금 상상 속의 사실을 이성으로 조절될 수 잉ㅆ는 구성에 의해 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의 ‘주어진’사실로부터 같은 모양의 구성을 되찾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형적 시각에 의해 자연을 통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단순화 단계는 의지(수직)-휴식(수평)으로 압축될 수 있으며, 모든 주제는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는 캔버스 평면을 하나의 실재(reality)로 받아들였으며, 선과 색채의 관계만을 추구하는 회화를 구축하여 했다. 그는 반 데스부르크 및 반 데레크와 가까워지면서 서로 교감을 확인하여 데 스틸 운동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몬드리안은 원과 사각형에 대하여, 이 원의 균형을 지향하는 인간은 점차 서로 대등한 즉 균형잡힌 관계를 이루게 될 석이며, 그의 자연에 대한 견해로부터 전 우주에 대한 관념화된 견해로 발전해 갔다. 모든 것은 통일성, 실재성, 아름다움 등이 내재해 있으며, 개별성을 총해서 이루어진 보편적인 삶과 문화 속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몬드리안의 <달걀모양의 구성: 나무> 시리즈를 분석해 보면, 처음의 나무는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점진적으로 생략되는 상황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주변 공간에 비해 강해 보이는 풍차와 바다 수면 위를 무겁게 누르는 수평선 등은 이 작품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이다. 큐비즘인 콜라주를 사용하거나 이와 유사한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이렇게 실제 사물의 외관을 닮은 유기적 형태를 배제하는 것은 러시아 화가들이 1~2년 후 깨달은 사실과 일치하고 있으며, 완전추상을 이류하는 것을 총해 보편적 조화 균형을 향한 길로 나아가게 된다.

몬드리안의 <달걀모양의 구성: 나무> 시리즈 분석

① 나뭇가지들은 단순화된 직선과 곡선으로 대치되어 주어진 공간과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제공하고 있다.②나뭇가지는 나무 자체의 생명을 더 이상 연장시켜 주는 부품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형요소가 되었다.③나무의 움직임은 역동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순수조형에 의한 수직과 수평의 우주적 활동으로 나타난다.④나무의 특성은 제거되고 우주적 본질이 되어 추상화된다.⑤사물의 균형의 본질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회화를 인간의 환경에 의해 부과된 불가피한 실험으로 승화시켰다. ”균형잡힌 조형은 인류를 충만하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예술의 종말이 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벌써 예술은 자기파괴를 시작했으나 종말이 오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삶에 의한 예술의 혁신은 아직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예술을 필요로 한다. 낡은 재료를 가지고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직. 수평을 통해서, 2원의 균형을 물질화하였으며, 바둑판과 같은 그리드(grid)구성을 통해 화면에 형태를 압축한 구성요소들을 확장시켰다. 심리적으로 연장될 수밖에 없는 화면을 독단적으로 자르는 순간에 화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로 넘치게 된다. 회화의 구성요소들이 그 화폭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 무한한 힘을 발산하며, 최소한의 형태를 사용하여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몬드리안의 ‘탈 자연(denaturalisation)’의 목표였다. 몬드리안은 이 세상의 무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미술의 목적이며, 조형의 해방은 탈 자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1926년『미술수첩』을 통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진정 새로운 회화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적 형태가 나타나는 식의 구성은 사라져야만 했다. 조형요소들을 통해 하나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순수직관’에서 출발해 고도의 감수성과 뛰어난 지성을 결합시킨 ‘순수한 관계 사이의 균형’을 이룬 구성에 도달하곤 했다. 오늘날의 미술작품은 자연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술작품에는 단지 자연과 인간의 근본적인 것, 즉 보편적인 것만을 표현하고자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몬드리안이 이룩한 추상은 결국 다양한 예술의 장벽을 넘어서 현대의 건축, 가구, 디자인, 공예 등을 비롯하여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로 공업용 상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단순화와 규격화를 이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형운동은 사회의 일각에 필요한 미적인 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모더니즘 추상의 원리의 기틀이 되었다.

또한, 수직과 수평에 의한 조형원리는 모더니즘 조형예술의 기본적인 요소로 사용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2022.03.06)

 

유물론적 세계관과 그 이탈의 과정 

이탈리아의 루치오 폰타나와 피에로 만초니 같은 선구자적 반항아들은 이미 현대 시각 문화의 대들보와 같은 회화의 지배에 도전했다. 1960년대까지 만초니는 “표시는 되어 있지만 보이지는 않게 하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그은 선을 둘둘 말아 가지런히 통 속에 넣는 작업”을 하곤 하였다. 또한 야니스 코우넬리스, 마리오 메르츠,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그리고 다수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아르테 포베라 혹은 빈곤 미술이 196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펼쳐졌는데, 그들은 주로 동물, 야채 그리고 광물 등으로 동시대 현실의 “암울한 모순”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북쪽에서는 시츄에이셔니스트 인터내셔날(situationist international)로 알려진 그룹의 일원인 덴마크 화가 아스거 요른이 역설, 반란 혹은 양자의 정신에 입각해 저급 장르 회화를 다시 그렸다.

1968년을 10여 년 앞둔 시점부터 이러한 경향은 그 주도권을 상실하고, 미디어 이미지, 파운드 오브제 그리고 극단적으로 불량하고 불만 가득한 소수 문화의 허무주의적 태도로 다루어진 도시의 잡동사니와 같은 저급 문화 소재를 배치하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어,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들을 노골적으로 병치한 혼합물과 같은 표현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미국 미니멀 작가들이 등장하여, 대칭적 형태를 사용하거나 전통적 구성이 결여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거의 색채가 없거나 색채가 있더라도 아주 단순하게 채색된 텅빈 기하학적인 오브제를 구축함으로써 도 다른 형태의 정통 모더니즘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단순한 오브네’는 당시에 다른 각도에서 모더니스트 회화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회화와 조각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들은 관람객 자신이 미적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을 취지로 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종종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산업적 생산물의 형태를 미술 문화로 격상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의 취향이 드러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미국의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에는 인간적인 ‘흔적’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일련의 오차나 흠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물의 정서에 있어서 대단히 견고하여 어떠한 외부적인 요인이 침투해 들어올 수 없게 함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은 사물관과 오브제, 가공과 비가공, 주문생산과 작가의 제작 등의 예술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칼 안드레, 도날드 져드 등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은 아이디어 스케치만을 행한 뒤, 단순히 주문서를 공자에 재시하였고, 작품은 수공업자가 도맡아서 제작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마무리된, 작가는 작품에 서명하는 것으로 하나의 작품이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르셀 뒤샹이 선택한 레디메이드에 서명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1960년대의 미니멀리스트들의 경우는 일종의 레디메이디를 작가가 특수한 목적으로 주문제작하였던 것으로 사물과 예술작품의 한계가 대단히 모호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또한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과 같은 작가들은 캔버스에 작가의 흔적을 최소화하여, 캔바스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특수한 정신세계를 강조하여, 동양사상과도 맥을 같이 하는 무(無)와 허(虛)의 경계를 탐구하는 독특한 작품을 보여 주었다. 그의 양식에 의해서 캔버스가 사물인지 아니면 예술품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독특한 미니멀 회화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미니멀리스트들은 유사한 캔바스나 동일한 캔바스를 동시에 여러 작품을 전시하여 ‘동어반복’형의 작품을 발표하영ㅆ으며, 그것은 어떤 면에서 정신병자의 반복행위와 같은 일면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화가들의 동어 반복적 양식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유럽에서는 이브 클라인이 청색의 캔버스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그것도 유사한 동어반복으로서, 의도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고는 하지만, 20세기 초의 단순화를 지향하던 추상운동의 결과와 어떤 점이 차별화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미니멀리즘과 초기 완전추상의 결과와의 차별성을 제기하는 경우 설득력을 지니기도 어렵고, 또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컨셉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별성을 두지 않기도 어려운 것이다. 다만, 두드러진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면, 이 시기에 와서는 결과보다는 의도를 중시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개념미술도 생겨났고, 오브제가 없는 미술도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제기와 단순화의 귀결점인 완전 추상이 이루어낸 결과와 사물과 오브제의 문제를 연구하여 이룩된 미니멀 회화의 결과는 이런 점에서 비슷한 지점을 스치고 니나걌던 것이다.(202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