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길李忠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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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FIN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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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길,꽃신,2013년10호p
서양화가 이충길 작업실

       이충길 (李忠吉) ​

  • 개인전 12회,

  • 단체전300여회

  • 1987~2019 부산 미술제 초대전,

  • 한·중·일·러 국제회화전,

  • 1995~2001 대한민국 회화제

  • 남북한 미술세계 독일 프랑크푸르트 초대전

  • 부산 미술의 흐름(70년대, 80년대)전

  • 2002~2020 부산 회화제,원로 작가 초대전 

  • 남송미술관 초대전,일원회 초대 대작전

  • 제2회 대한민국 인터전 특선

  • 한국전업미술가협회(삶과작업)대작특별전

  • 제3회 한국전업미술가상, 수상

  • 제8회 부산 전업미술가상, 수상

  • 제28회 열매전

  • 한강미술대전 심사위원장,

  • 서울여성미술대전 심사위원,

  • 송혜수미술상 심사위원,

  • 부산미술대전 서양화 심사위원장.

 

현)한국미협,부산미협,부산전업미술가협회고문,

열매회,미술단체일원회자문위원,부산비엔날레회,

환경미협,부산비엔날레회,환경미협. 




 Nostalgia from oid things
옛것들의 노스탤지어 - 이충길 李忠吉


나는 1945년생 해방둥이다. 내가 자랄 당시의 부산은, 해방의 기쁨을 느낄 겨를도 없이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온갖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의 어린 시절은, 사업을 하시는 어머님 덕택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른 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비교적 넓은 집에서 외조부님께서 소장하셨던 신기한 물건들과 함께 유년기를 보낼 수  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무심코 지나쳤지만, 어린 나의 눈에도 신기하게 자꾸 눈에 들어온 병풍이 하나 있었다.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 그리고 독수리 그림과 갖가지 새 그림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그림을 한번 그려야겠다고 어린 마음에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살던 우리 동네에는 극장이 두 군데나 있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놀이터는 극장의 영화 포스터를 그리는 작업실이었고, 그곳은 나에게 신나는 놀이터이자 내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간판 그리는 아저씨들이 그림을 그려보라고 붓과 함께 작업실 구석진 곳 한쪽을 내어주기도 했고, 가끔 아저씨들이 내 얼굴을 그려주기도 하면서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그림 그리는 것이 어느 순간에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의 이런 일면을 알고 계시던 어머님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셨다. 그림 그리는 사람을 당시에는 '환쟁이' 라 부르며 천시여기고 업신여겼던 시절이라 유난히 반대를 많이 하셨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우연찮게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게 되었고, 전국 사생실기 대회에서 몇 번의 최고상을 받게 되자 그로인해 자연히 홍익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하게 된것이 오늘날까지 그림을 그리게 된 인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고, 또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 패기에, '그까짓 거 뭐, 내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겠지, 난 할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에 내가 하고 싶은 그림,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의 세계 빠져들었다. 그림과 연관된 일이라면 겁도 없이 뛰어들기 바빴고 결과적으로는 실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한때는 시골 중하교 미술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이건 나의 길이 아니라고 이내 버려버렸고, 미술학원 운영에 뛰어들어 한때 2개의 미술학원 원장으로 있는 등, 한순간은 벙영기를 누렸지만 그것마저도 길게 가지는 못하였다.

IMF 사태가 터진 직후, 미술학원의 규모는 크게 벌여놓은 데다가 운영적자를 수습할 길이 없어 자금난의 적가와 빚더미 속에 고스란히 앉게 되었다. 뒤늦게 학원을 소규모로 줄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빚으로 넘어가고, 남은 것은 빈 껍데기와  어깨를 짓누르는 사채빚과 카드빚뿐,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의 연속인 시기가 있었다. 차라리 이 한 몸 없어지면, 모든 게 그만이지 않을 까 하는 무책임한 생각도 수 없이 해 봤다. 힘들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법원의 도움을 받아 개인회생 신청제도를 통해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가던 와중에도 그림에서만큼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이라도 그리고 앉아있어야 나의 존재감을 찾을 수있었으니까, 그림 속에서만큼은 빚쟁이도 없었고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평생을 그림만 그리다보니 그림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우연찮게 '인터넷 미술대전' 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신동권 화우를 통하여 제2회 인터넷 미술대전에 참가하고 당당하게 특선을 수상하며서 인기 작가로서의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전문가의 주관적 판단이나 시선이 안닌, 미술품 애호가 및 인반 대중의 선호도와 그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수상한 것이어서, 그 의미는 더욱 컸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 또한 많아졌다. 많은 격려의 글과 메시지, 그리고 '새로운 스타탄생'이라 수식어까지 덩달아 얻었다. 그러다보니 작품이 조금씩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의 가격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스케치하고, 머릿 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작품화하느라고 밤을 낮처럼 보냈다.  무엇보다 나의 작품을 구입하고 소장하려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분들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내 그림과 나의 작품세계를  인정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신 분들이다. 하늘을  우러러 맹세코 나는, 팔기 위해서 작품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한 작품 한 작품에 열과 성을 다해서, 나름대로의 독측한 표현 방법을 창조하고 연구하며 나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나이프를 들고 캔버스를 마주한다. 이러한 나의 작품을 알아봐 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주며, 더불어 '좋은 작품을 소장하게 해주어 고맙다, 감사하다' 는 연락을 주신 분들께, 작가로서는 그보다 더 힘이 나는 일이 없고 앞으로도 꾸준히 자긍심을 갖고 힘닿는 데까지 더 열심히 노력하여 작품 활동을 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옛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예술정신세계에 나의 심성도 함께 동화된 느낌과 그 감각을 새로운 이미지로 나타내고가 노력한 결과물이다. 진흙탕 소게서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한 송이의 연꽃처럼, 나에게 처한 불우한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고귀한 아름다움과 향기를 사방에 퍼지게 하듯, 내 작픔 보고 느끼는 모든이들이 행복감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이번 전시회 작품들의 창작의도라고 하겠다.

끝으로 , 아버지의 경제 관념 무능으로 우리 아들(행로), 딸(지영)이 많이 힘들지? 얼마 받지도 못하는 월급, 몽땅 아버지 빚 갚느라고 애쓰면서도 아버지 힘 빠질까봐 약도 챙겨 주고, 아버지를 믿으니까 끝까지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내 아들, 내 딸아, 고맙다. 못난 남편, 그림 밖에 모르는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얼굴에 주름 가득해진 나의 아내여, 이 순간, 나이 칠십 먹어 열게 된 이 전시는 당신 얼굴 마주하면 고마움이라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구려.
  이번 전시회는 우리 가족의 응원이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음에 감사하며...... 늙으면서 철드나보다 

2014년 7월  칠순 기념 전시회에 부쳐 (이충길)